제37차 포럼 안내
제37차 포럼에 초청합니다
존경하는 평화통일포럼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 동안 진행했던 아침시간을 저녁시간으로 변경하게 됨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금번 포럼은 남북정상회담에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준비하였사오니 이 뜻 깊은 저녁행사에 모두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아 래
○ 일시: 2018.5.18.(금) 오후 6시
○ 장소: 서울시 교통문화교육원 2층(사당역5번 출구 80m전방)
○ 강사: 송 대 성 박사
○ 제목: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안보 현안 과제
○ 회비: 일만원(저녁식대)
주인을 잃어버린 기업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국가는 망했습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기업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국가는 망했습니다.
또한 지나친 권력다툼이나 독재도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강화도령 이원범을 철종왕(제25대)으로 세우고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한 때부터 병들기 시작했고
다시 왕권을 바로 세우겠다는 대원군의 지나친 권력장악으로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가 중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제25대 철종
1849년 7월 28일 (음력 6월 9일) ~ 1864년 1월 16일 (음력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
조선 25대 왕 철종(이름 변. 초명은 원범)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 인(裀)의 손자로
1831년 경행방 사제에서 태어났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뒤로는
국구가 된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는데 점차 나이가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면서
1859년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1862년 진주 단성지방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봉건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려는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를 씌워 체포했다.
이후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탄압했으며,
철종은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했다.
동학과 삼남지역의 민란
최제우의 처형 이후 동학에서는 상소와 연판장을 올려 교주가 역적이 아니라며 신원을 요구하였다.
1862년 1월에는 향리, 아전들의 착취에 견디지 못하고 경상도 진주에서 난이 발생한다.
진주민란은 육지로 확산되었지만 곧 관군에 의해 제압된다.
1862년 9월 진주민란의 자극을 받아 제주도에서 서광리 사람 강제검(姜悌儉, ?~1863)과
제주 제주목 사람 김흥채(金興采, ?~1863) 등을 중심으로 민란이 발생한다.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거병, 민란을 일으켜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다.
진주민란과 제주민란 당시 공격 대상은 주로 세금을 실질적으로 거두는 향리와 아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제주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1863년 1월에 진압되고
제주민란의 주동자인 강제검, 김흥채는 체포후 압송되어 처형된다.
1862년부터 철종은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고,
누워있거나 의원의 어배진(임금의 진찰)을 보면서 겨우겨우 정무를 결재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아무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수로 천거된 북청군의 물장수는 "내가 북청 군수로 임명된 아무개이니
상감 마마님 잘 부탁합니다레."라고 말하여 조정이 소란해졌지만,
철종은 오히려 깎듯이 하지 않은 그 인사의 순진함을 보고 초심을 잃지 말라며 다독였다 한다.
이는 유주현이나 김동인의 시대에까지 전해져 유주현과 김동인의 소설에도 인용되었다.
원래 몸이 병약한데다가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 했다.
그는 조정에서 연회를 볼 때나, 후궁, 기녀들과 만찬, 음주할 때에도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달려나가
슬피 눈물을 흘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다. 이를 두고 매천 황현은 철종을 가리켜
“철종은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아둔하였다” 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가 일어날 가망이 없다고 본 흥선대원군은 이 무렵부터 자신의 서녀를 통해
사돈 이호준, 이호준의 정실 사위 조성하, 조성하의 종형제 조영하 등을 통해 암암리에
조대비와 은밀히 물밑 교섭을 시도하여 다음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1864년 1월 16일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철종 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후사는 족보상 그의 7촌 조카뻘이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 (훗날의 고종) 이 계승하였다.
철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실제 직계 남자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종손으로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자료출처 : 인터넷
